top of page
클로버

한없이 나 자신을 비난하고 우울에 잠기던 시절이 있었다.

‘이게 아닌데…’


한참이나 손에 붙들려있던 붓질을 멈췄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몇 가닥을 쓸어 넘기고 절로 나오는 한숨을 쉬었다.

늦여름, 아이들이 하교하고도 남은 시각. 홀로 미술실에 남아 그림을 그린 지 일주일쯤 되었을까. 생각만큼 풀리지 않는 그림 문제에 머리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왜 이러는 거야 정말…”


내가 가려는 길이 과연 맞는 걸까? 그림을 좋아하기만 하면 안 돼. 실력이 있어야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미술을 하고 싶어 했다. 그냥 나에겐 운명 같았다. 돌잡이 때 만약 연필과 실 사이에 붓이 있었다면 그걸 잡았을지도. 그렇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따라와 주질 않는다. 고등학교로 올라온 뒤 입시학원을 다니게 되면서 어느 순간 내 그림체를 잃고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루에 오로지 내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하교 후 학원 가기 전까지의 두 시간 정도. 나는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쓰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갑자기 닥쳐온 답답한 현실에 울컥하는 마음이 들어 눈물이 차올랐다. 그렇게 한참이나 제자리에 쭈그려 앉아 있었을까.

 

삐그덕 ―

 

잔잔한 공기 사이로 마룻바닥들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고, 화들짝 놀라 두 팔 사이로 묻고 있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어 저기..”
“…”
“괜찮아?”

낮은 목소리도 아닌, 그렇다고 높지도 않은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문 앞에 서있던 아이는 살짝 당황한 얼굴을 하고선 나에게 다가왔다. 연한 갈색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일렁거렸다. 반듯한 하복 셔츠 아래로 박그림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아 미안.. 몰래 보려던 건 아니었고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쪽팔려. 누군가에게 들켰다는 느낌에 그리고 그 누군가가 지금 내 앞에 서있는 박그림이라는 사실에 더 부끄러워져 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고는 치마를 털며 일어섰다. 

“괜찮아.”

이젤로 걸어가 급하게 미술 도구들을 챙기고 있었을까. 왜인지 바로 교실 밖으로 나갈 줄만 알았던 박그림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 하필 지금 내 앞에 네가 있는 걸까. 더위 때문인지 발갛게 달아오르는 뺨의 온도가 지금 내 기분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나를 쳐다보던 너는 왜인지 예쁜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 있잖아. 괜찮으면”
“나랑 같이 공부할래?”

 

 

나랑 같이 공부할래?라는 말에 얼마나 황당했었는지. 뭐?라고 되물어오는 나의 반응에 쑥스러운 듯 뒷목을 쓸어 넘기던 네가 입을 마저 열었다.

‘나도 하교 후에 빈 교실에서 글을 쓰거든.’
‘너만 괜찮으면 미술실에서 같이 하면 어떨까 싶어서’

나는 글 쓰고 너는 그림 그리고, 어때?


아무런 꾸밈없이 물어온 말에 나는 뭐가 좋다고 그래 라고 하였는지

그건 아마 나로서도 숨기지 못한 널 향한 마음 때문이었을 거야.

그렇게 우리는 하교 후 짧은 시간 동안 같이 지내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드르륵 ―

“안녕.”


오늘도 어김없이 미술실에 자리 잡고 있는 네가 나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다. 박그림과 미술실에서 같이 지낸 지 일주일 정도 지났다. 나는 항상 널 멀리서만 지켜보았는데 이렇게 한 순간에 좁혀진 거리에서 보게 되다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그동안 하교 후 같이 지내며 우리는 각자의 꿈들을 공유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너는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거 꼭 작가가 되어서 책을 내고 싶다는 거. 여름의 끝자락, 밖은 매미가 맴맴― 울었고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교실을 가득 채웠다. 마치 이 시간 속엔 오로지 우리 둘만 존재하는 거처럼 학교는 고요했다. 이젤을 펼치다 한 손으로 턱을 받치고 무언가 끄적이고 있는 너를 보고선 입을 달싹였다.

 

“있잖아.”

“응.”

“너는 원래 의대 가려는 거 아니었어?”
“네가 어떻게 잘 알아?”

“그야…”


네가 전교생들이 다 알정도로 아주 유명하니까 그렇지 라는 말은 삼가기로 했다. 박그림. 모르는 애들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하지 성적은 전교 3등 안에 들고 공부는 물론 운동도 잘하는 뭐든 뛰어난 아이였으니까. 그저 멀리서 지켜봤을 때 빛이 나는 그런 아이였으니까.

“음.. 의대 가려는 건 맞아.”

 

통상적으로는 아마 그렇지?라고 말한 뒤 쓴웃음을 짓는 너의 얼굴에 담담한 감정이 맺혀있는 듯했다.

 

“근데 그건 내가 원하는 건 아니니까.”

 

 

 

 

 

 


/
“오늘은 뭐 그려?”
“글쎄.. 그냥 그리고 싶은 거?”

 

오늘도 그림 그리는 준비를 하는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네가 이젤 옆으로 불쑥 다가왔다. 샴푸 냄새일까? 시원한 시트러스 향이 코를 스쳤다. 향기는 사람을 표현한다고들 하는데 그 말을 오늘에서야 깨달은 거 같다. 오렌지 그리고 라임향. 너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오늘은 나 그려주면 안 돼?”
“안돼.”
“이렇게 빨리 거절할 줄은 몰랐는데.”

 

너무 단호하게 거절한 걸까 살짝 민망해하며 말을 꺼내는 너를 보며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 내가 너를 왜 그려줘.”

 

너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다간 나의 감정이 들킬 거 같단 말이야. 이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눈을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고 웃는 네가 한번 더 나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대신 나도 널 위한 글을 써줄게. 어때?”

 


슥슥― 종이와 연필이 맞닿는 기분 좋은 소리가 미술실을 가득 채웠다. 교실 중앙 책상에 걸터앉은 네가 햇빛이 비춰오는 창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하얀 커튼이 일렁거렸고, 부드러워 보이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흩날렸다.

“바람 좋다.”

“움직이면 안 돼.”

“알겠어. 엄청 집중했다 너”

 

스케치로 채워져 나가는 도화지를 쳐다보다 그림을 핑계로 너를 다시 한번 더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널 잊지 못해.

미술실 앞 화단에 수놓아있던 은은한 라벤더 향기, 살짝 후덥지근한 온도. 그리고 여름과 제법 어울리는 너.

 

 

구차한 설명이 붙지 않아도 확연히 보이는 네가, 이 계절이 좋아.

 

 

 

 

//
그렇게 매미가 더 이상 울지 않는 계절이 찾아왔고, 너는 더 이상 미술실에 오지 않았다. 한 달 동안의 시간이 마치 꿈결이었던 거처럼 우리는 그 흔한 연락처도 서로 몰랐고, 복도에서 한 번씩 마주쳐도 그저 어색하게 눈인사만 하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렸다. 처음엔 내가 무언갈 잘못했던 걸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다.

우린 처음부터 그저 그만큼의 관계였을 뿐이었다.

 

너는 몰랐을 거야. 내가 여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미술실에 왔던 이유는 너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었던 거라고

그렇게 하복에서 동복으로 바뀌는 시기쯤 입시로 인해 바빠져 더 이상 나도 미술실에 가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그 여름의 추억은 빛바래져 갔다.

 

“자 그럼 다음은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학생부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강당을 울렸고 졸업생들은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었다. 어느새 계절은 가을을 지나 유난히도 시린 겨울이 되었다. 동복에 마이까지 입었는데도 숨을 내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눈앞에 일렁거렸다. 내 앞에 서있던 친구는 나를 향해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오늘 졸업식인데 훈화 말씀 길게 하는 거 아니겠지? 어휴”
“.. 그러게”
“너 누구 찾아?”
“어..? 아니?”
“고개를 휙휙 돌리길래 누구 찾고 있나 싶었지.”


사실 강당에 들어설 때부터 내 눈은 너를 찾고 있었다. 오늘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몰라서 보고 싶었는데.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친구에게 답했다.

“내가 찾을 사람이 어디 있어.”


 

 

 

 

 

 

 


“졸업 축하해!”
“수고 많았어.”

강당에서의 식 회가 끝나고 운동장으로 나가자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격려의 소리들이 들려왔다. 친구와 나도 부모님의 손에 들린 카메라에 대고 서로 팔짱을 끼고 브이를 취했다. 그렇게 연신 웃다가 운동장 한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내 동공은 커졌다.


“박그림이네.”
“.. 그러게.”


친구의 말에 애써 담담한 척 박그림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 아이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너는 여전히 빛나는구나. 졸업가운을 입고 웃고 있는 모습에 꽤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친구가 말했다.

“쟤도 좋겠다. 졸업하자마자 유학이라니.”
“유학?”
“나랑 친한 남자애가 박그림이랑 같은 반인데 얼떨결에 들었대 유학 간다고. 어디였지 캐나다였나?”
“…”

유학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친구의 말에 잠시 멍해져 너만 쳐다보고 있었을까. 착각인진 몰라도 그 짧은 순간에 너와 눈이 마주친 거 같았다. 갑자기 소화되지 않는 무언갈 삼켜버린 듯, 이름 없는 감정들이 몰려왔다.


“미안. 나 잠시 화장실 좀”

///
드르륵―

 

미술실 문을 열자 꽤 먼지가 쌓인 듯 탁한 공기가 목구멍으로 들어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한 손을 위아래로 휙휙 저었다. 그러다 미술실 한편에 네가 자주 앉던 자리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계절은 당연히 겨울인데, 나는 아직 그 시간에 머물러있는 듯 여름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추위에 새빨개진 손으로 책상을 매만졌다. 그리고 몰래 감춰왔던 그림 한 장과 네 잎 클로버를 자리에 올려두었다.

누가 발견하든 상관없어. 그냥 여기 추억 속에 묻어둘 뿐이니까.

 

그렇게 미술실을 나와 본관으로 나서자, 아까까지만 해도  잠잠했던 하늘에서 새하얀 눈송이들이 내렸다. 그리고 여름을 닮아있던 너의 목소리가 너의 웃음이 들려왔다.

 

‘너는 참 용기 있는 거 같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는 용기 없는 사람이야.

“ 좋아해…”
“ 좋아했어 그림아.”

듣지 못하는 고백이 내 마음을 헤집었다.

재이.png
하트를.pn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