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ate Summer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가 앉을 만큼 좁디좁은 고해소 안, 성호를 그은 채아가 시선을 내렸다.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굳게 믿으며, 그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맞은편에서는 신부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야 채아는 고개를 들었다.
“첫 고해입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살인 충동을 느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채아의 이야기는 시작됐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의 시작은 약 한 달 전이었다.
[나는 오늘 박윤수를 죽일 뻔하고 말았다. 이유는 터무니없다. 박윤수가 미쳤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또라이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또라이일 줄은 몰랐다.]
만약 채아가 다이어리를 꾸준히 썼다면 최근 며칠간 한결같이 쓰여있을 문장이었다. 그만큼 이상했다. 요즘의 박윤수는.
그럴리는 없겠지만 한채아에게 박윤수란? 이라는 질문을 누군가 했다면, 채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을 거다.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징글징글한 뱀파이어 새끼라고.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약점이 잡혀 뱀파이어의 인간 먹이 운반책 노릇을 하게 될 줄은 채아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박윤수와는 시작부터가 악연이었다. 악연도 이런 지긋지긋한 악연이 없었다. 박윤수에게 약속을 받아내고 자유를 되찾았던 때만 생각하면 채아는 자다가도 만세삼창을 할 수 있었다. 그런 사이의 박윤수와 한채아였는데, 멀쩡하던 박윤수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그림이 때문에 채아의 앞집으로 박윤수가 이사를 오면서부터였다. 아니, 정확히는 이삿날만 해도 멀쩡했던 것 같았다.
정확한 때를 말하라고 한다면, 그래. 우연히 박윤수가 아버지라고 부르던 금발의 외국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뒤부터인 것 같았다.
[...깁스 풀었네요. 다리는 이제 괜찮아요?]
천하의 박윤수가 유일하게 어려워하는 아버지. 하필 그 사람과 마주쳐서인지 눈에 띄게 곤란해하는 얼굴을 하며 시선을 피하던 박윤수는 아직도 채아의 머리에 남았다. 괜히 신경이 쓰인 채아가 다리가 멀쩡한지 확인한다는 핑계를 대며 집 앞을 거닐어보려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박윤수가 온 건가 앞집을 한번 기웃이다 기척 하나 없는 것에 복도를 서성이고 결국 1층으로 내려간 것도 그래서였다.
내려가는 계단 중앙에서 마주친 박윤수는 채아를 보자마자 그 한마디부터 던졌다.
[어...? 어, 뭐.]
언제부터 내 다리에 그렇게 신경을 써줬다고. 따지고 보면 채아의 다리가 이렇게 된 것도 나 저놈의 박윤수 때문이었다. 꼭 고양이가 쥐 생각해주는 격이라 조금 기분이 이상해진 채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오늘 풀었는데 그렇게 움직여도 되는 거예요?]
[어...?]
바보처럼 자꾸 어어?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박윤수의 말투가 평소에 비해 지나치게 다정하게 느껴졌으니까. ...착각이겠지?
찝찝한 눈으로 박윤수를 관찰했지만, 하는 말처럼 박윤수는 정말 채아의 다친 다리에만 시선을 던졌다. 어찌 되었든 멀쩡한 것도 확인했으니 채아는 미련없이 박윤수를 지나치려고 했다. 탁하고 잡아오는 박윤수의 손이 아니었으면.
팔에 얹어진 박윤수의 손을 한번, 박윤수의 얼굴을 한번 번갈아 바라보던 채아는 결국 두 눈만 깜빡였다.
[왜?]
그때서야 박윤수는 뒷목을 매만지며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행동에 채아의 미간도 점점 구겨지려는 찰나였다.
[어디 가는데요?]
[...그냥 집앞 산책. 이거 좀 놓지?]
거슬리는 걸 털어내듯 채아가 팔을 흔들었다. 그때서야 손은 떨어져 나갔지만, 한 발자국 다가서는 박윤수에 채아는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퍼스널 스페이스를 제멋대로 침범한 박윤수 때문이었다. 조금 불편해진 채아의 감정이 표정으로도 드러났다. 멀쩡하던 애가 아버지 잘 만나고 와서는 갑자기 왜 이렇게 변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같이 가죠. 저도 바람 좀 쐬고 싶은데.]
싫었지만,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대신 집에 없는 그림이 핑계를 댔지만, 그럼 같이 찾아보자는 이상한 대답만 돌아왔다. 그것도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채아는 박윤수와 사이좋게 밖을 거닐게 되었다.
[...채아 씨.]
서로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고 걷길 몇 분, 불현듯 박윤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박윤수는 오늘따라 정말 이상했다. 길을 걷다 보이는 카페에서 덥지 않냐며 음료를 주문하질 않나, 피만 마시는 줄 알았던 뱀파이어가 커피도 마시나 싶어 가만히 지켜봤더니 그것을 불쑥 채아에게 내밀기까지 했다. 넌...? 얼떨결에 받아들며 물으니 박윤수는 고개를 저었다.
[채아 씨가 먹는 것만 봐도 충분해요.]
오싹 소름이 돋는 건 당연했다. 설마 지난번의 그 같잖은 남자친구 흉내를 다시 내는 건가 싶어 주변을 재빨리 둘러봤지만, 성당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며 마음을 놓기엔 그게 더 이상했다. 확실히 박윤수는 정말로 이상해졌다.
그리고 마음의 결정이라도 내린 건지 우뚝 멈춰 선 박윤수에 거의 다 마셔가는 아이스 카페라떼를 쪼옥 빨며 자연스레 채아도 걸음을 멈췄다. 시원한 걸 마시고 난 뒤라 괜찮았지만, 무더워지는 날씨는 날이 저물어가도 온도가 꺾일 줄을 몰랐다. 여름은 여름이구나. 이어질 박윤수의 말을 기다리며 채아는 송글송글 물방울이 맺힌 컵을 한번 흔들었다. 덜그럭. 얼음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플라스틱 컵 안에서 들려왔다.
[저 채아 씨 좋아하나 봐요.]
그러나 이어진 말은 충격적이었다.
[아니, 확실히 좋아하고 있네요. 채아 씨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그 다음 말은 소름 끼칠 만큼 충격적이었다. 털그럭. 결국, 힘이 빠진 손에서 떨어진 커피잔이 바닥을 굴렀다. 얼음만 가득한 잔이 데구르르 굴러 박윤수의 발치까지 닿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
[저랑 연애 한번 해볼래요?]
미쳤다. 채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박윤수가 드디어 미치고 말았다.
“진짜 미친 게 분명하다니까?!”
소리치는 채아에 평소 같았다면 들은 체 만 체하며 게임이나 하고 있을 그림이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게 충격적인 광경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면 채아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그 새끼가 나한테 꽃을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왜 쑥스러워하는 건데?!”
그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그 박윤수가 플로리스트의 손길이 닿았을 게 분명해 보이는 예쁜 꽃을 들고 보란 듯이 집 현관문 앞도 아니고 아파트 사람들도 오가는 현관 앞에 서 있는 것부터가 그랬다. 채아를 보자마자 반갑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더니 어색한 몸짓으로 꽃을 건네주며 귀까지 붉혔다. 꼭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종래엔 시선을 피하더니,
[이걸 보니까 채아 씨가 생각나서요.]
라는 말을 뱉는 거다. 편의점을 다녀온 탓에 양손에 바리바리 짐을 들고 뒤따라오던 그림이 또한 그 광경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모조리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아버지란 사람을 만나고 저렇게 됐는데 혹시, 아버지랑 무슨 충격적인 일이 있어서 미친 걸까?”
“...확실히 일리 있어. 그 사람, 진짜 무서웠거든.”
채아의 추리에 그림이 또한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죽이려고까지 한 남자였는데, 아무리 박윤수라도 해코지를 당하지 않는단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단둘이서 독대까지 했다면, 문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런데, 나한테 잘해줘서 얻는 이득이 뭐지?”
그러다 문득, 채아가 중얼였다. 물론 그림이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물론이고, 박윤수도 한채아에게서 얻을 이득이라곤 없었다. 그래도 굳이 하나를 꼽는다면.
“채아 씨, 이것 좀 먹어요.”
신선놀음이 이런 거고 지상낙원이 이런 곳일까? 잔고장이 나던 에어컨이 완전히 맛이 가버린 건 어젯밤이었다. 원룸이라 생각 없이 에어컨을 펑펑 틀어대어 열대야에 대해 무감했었는데 채아는 여름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어젯밤, 온몸으로 체감하고 말았다. 채아보다 조금 더 체온이 낮은 그림이조차도 벌게진 얼굴로 화장실을 왔다갔다하며 연신 찬물로 몸을 씻어댈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참다못한 그림이가 그토록 껄끄러워하던 박윤수의 집으로 제 발로 찾아가고 난 뒤에야 채아는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단 걸 깨닫고 말았다.
그래도 그놈의 자존심이 뭔지 혼자 꿋꿋하게 버티려고 했지만, 얘기를 들은 건지 앞집에 있던 박윤수가 채아의 현관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지금이었다. 좁은 원룸에 셋이서 옹기종기 모여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박윤수는 채아와 함께 원래 살던 저택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올 일이 없다고 말해도 저택으로는 한 발자국도 가지 않으려는 그림이에 설득을 포기하고 박윤수의 원룸을 내주었다. 그림이도 없이 박윤수와 단 둘이서 있으려는 게 조금 껄끄러웠지만, 채아는 얼굴에 철판을 깔기로 했다. 게다가 어제는 성당에서 고해성사까지 보고 온 길이었다. 아무리 또라이라고 하지만 살인 충동까지는 조금 지나쳤다. 나는 박윤수랑 똑같은 인간이 아니니까. 죄를 뉘우쳤으니 어쨌든 채아는 떳떳하기로 했다.
그런데 떳떳하다 못해 팔자가 늘어지고 말았다. 추울 정도로 빵빵한 에어컨에 폭신한 극세사 담요를 두르고 채아는 취향을 저격하는 영화들을 아까부터 연달아 보고 있었다. 98인치 대형 tv 모니터는 하도 커서 굳이 극장 스크린이 필요 없을 정도였고, 박윤수는 아까부터 과자니 과일이니 제 손으로 직접 깎아 채아에게 건네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혼자 살기에 원룸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대형 tv와 먹기 좋게 접시에 담아 눈앞으로 가져다주는 주전부리의 유혹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게다가 끼니때가 되면 말하지 않아도 채아 몫의 상이 차려졌고, 심지어 박윤수는 채아와 눈만 마주치면 미소를 지으며 필요한 건 더 없냐고 물었다.
처음엔 엄청 소름 끼쳤었는데,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채아 또한 적응이 되고 말았다. 신경을 살살 긁으며 시비를 거는 것보다는 나은 거지, 뭐. 좋게좋게 생각하며 쿠키 하나를 집어 막 입에 넣으려던 채아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가끔 한 번씩 정도는 줄게, 피.”
그 말에 과자의 포장지를 하나하나 까서 접시에 올리던 박윤수의 행동이 멈췄다.
“...네?”
“피 말이야. 처음에 짜증 났는데, 이렇게까지 정성이면 나도 미안해서라도 줄 수밖에 없겠어. 헌혈한다고 생각하고 줄게. 너, 내 피 좋아하잖아. 이거 때문에 그러는 거 맞지?”
아무리 생각해도 한채아에게 잘해주며 박윤수가 얻는 이득은 피밖엔 없었다. 이젠 생각조차 하기 싫지만, 죽은 남해원을 없애주겠다며 피로 거래까지 제안한 박윤수인데 이런 짓도 못할 건 없을 터였다.
“...한채아.”
하아. 낮은 한숨을 내쉬며 박윤수는 마른 세수를 했다. 뭔가 심란하고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미안해.”
이어지는 말엔 쿠키를 오독 깨물던 채아의 눈이 커졌다.
“...뭐?”
“고백보다는 미안하다고 먼저 말했어야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어.”
미안하다는 말에 나도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 건가? 짧은 순간 채아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었다. 설마하니 저 박윤수가 미안하다는 사전적 의미 그대로 말할 리는 없었으니까. 쟤가 그럴 리가 없잖아.
“목적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닌데, 내 말은 믿지 못하겠지. 다 내 잘못이야.”
“야, 너 왜 그래...?”
진짜 미쳤나 보다. 채아가 중얼였다. 얼굴은 박윤수인데 하는 짓이 박윤수가 아니었다.
“용서해달라고는 안 해. 그런데 사과하고 싶어.”
아니...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입술은 달싹여졌지만, 막상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너한테 그런 짓을 저지른 걸 뼈저리게 후회해.”
“...박윤수.”
“미안해, 한채아.”
“알았으니까, 그만해.”
결국, 채아의 손이 박윤수의 입술을 덮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박윤수의 새까만 눈동자가 일순 커졌다.
“충분히 알겠으니까 그놈의 미안하다는 말 좀 하지 마.”
아니, 비단 접촉 때문만은 아니었다. 박윤수의 시선이 뚫어질 듯 채아를 향했다. 빤히 바라보는 그 시선에 결국 먼저 눈을 피한 건 채아였다.
“...차라리 좋아한다느니 사귀자느니 그딴 말을 하던가.”
두 뺨이 뜨거워졌다. 차마 박윤수를 바라볼 수 없는 눈동자는 애꿎은 바닥만 향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큰일인 건가?
어째서, 사귀자는 말엔 멀쩡하다가 처음으로 하는 사과에 가슴이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후회한다니. 내 잘못이라니. 여전히 박윤수의 입을 틀어막은 손 대신 다른 쪽 손을 들어 채아는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래도 저 말을 듣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박윤수가 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터라 갑작스레 듣게 된 사과는 채아의 가슴에 직격탄으로 박혔다. 두근. 두근. 긴장이라도 하듯 심장이 요동을 쳤다.
“...좋아해.”
그리고 채아의 말대로 이번엔 고백이 들렸다. 어느새 채아의 손목을 잡아 내리며 박윤수가 나직하게 말했다.
“하...”
결국, 채아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 섞인 한숨이 흘렀다. 씨발. 좆됐네. 그리고 동시에 속으론 욕설이 중얼여졌다. 지금 심정으로는 박윤수가 사귀자는 헛소리라도 지껄였다간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에어컨은 여전히 추울 만큼 작동되고 있었지만, 몸은 왜인지 자꾸만 더워져 갔다. 아무래도 채아는 앞으로 여름이 싫어질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