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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波瀾)

한 번 사는 인생 가늘고 길게 살자.

한채아 인생의 가장 큰 모토였다. 사람들 사이의 워너비 인생은 짧게 살더라도 굵게 남기는 게 좋지 않겠냐지만, 그 말은 뜬구름 잡는 사람들이나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한채아는 변화도, 급작스러운 것들도, 도박도 혐오했다. 계획에 없는 것들은 대체로 사람의 숨을 갉아먹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그날 있었던 일들은 모두 꿈이어야 했다.

 

 

파란(波瀾)

 

 

한채아가 박윤수를 처음 알게 된 건 세상이 가열되기 시작하던 여름날이었다. 뭐, 처음 본 건 아니고 같은 반이기는 했었다. 그런데도 아는 사이가 아니었던 건 한채아가 원래부터 남에게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수능까지 1년 조금 넘게 남은 이 시점에서 타인에게 쏟을 힘 같은 것은 만들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유난히 계획대로 되지 않던 날이었다. 독서실에 안경을 두고 오는 바람에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내내 흐릿한 글씨를 알아보느라 힘들었고, 책을 빌리기 위해 갔던 도서관은 사서 선생님의 출장으로 인해 닫혀 있었다. 하루종일 예정에 없던 일들에 시달렸다. 마지막 계획은 무조건 성공하리라 확신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편의점에 들러 샌드위치를 하나 사서 독서실에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종례를 끝마치자마자 담임선생님이 한채아를 교무실로 불렀고, 그 생각마저 이루어지지 못했다. 교무실에 들어가자, 담임선생님이 한채아에게 서류더미를 한가득 넘겼다. 후덥지근한 교실과는 다르게 교무실은 쌀쌀할 정도로 시원했다.

 

 

“채아야. 이 서류들 좀 전부 파쇄해 줄래? 스테이플러 심 박혀 있는 서류 있으면 심만 뺀 다음에 파쇄기에 넣으면 되거든.”

 

 

아니. 그걸. 왜. 저한테.

 

한채아는 그날 깨달았다. 사람은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다. 정말이다. 그런데도 침을 뱉지 못한 건, 그 침이 언젠가 자신의 생활기록부에 돌아오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심으로 수시를 그만두어야 할지 고민할 뻔했다. 이를 꽉 깨물고 대충 끄덕인 뒤, 교무실 구석에 앉아 서류 정리를 하려 했다. 그래. 하려고 했다.

 

 

“채아야, 미안한데 오늘부터 시험 문제 출제 기간이라서. 문서는 교실에서 정리하고 파쇄는...... 아마 교실에 수동 파쇄기 있을 거야. 그걸로 해야겠다. 정말 미안.”

 

 

시험 문제 출제 기간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는 걸 보면 기말고사가 머지않았다는 걸 선생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 한채아가 작게 읊조렸다. 아주 지가 보는 시험 아니라고 막 시키네. 한채아는 대답조차 포기했다. 여기서 화낼 기력도 없다. 참자.

 

분노를 삭이며 교실로 돌아왔다. 텅 비어 있을 것 같았던 교실에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다. 교복을 입은 걸 보니 같은 학생인 것 같기는 한데, 남들한테 영 관심이 없으니 누군지도 알 수가 없다. 야자하나? 아니 근데 자습실 우리 반 아니지 않나. 한채아는 잠깐 생각했다. 그러다 말았다. 잡생각할 시간에 빨리 끝내고 독서실에 가야 한다. 책상에 앉아 스테이플러 심을 하나하나 뽑아내기 시작했다. 뽑다간 이거 날 새겠네. 한채아는 가위를 들어 심이 고정되어 있는 부분을 잘라냈다. 빨리 끝내야 한다. 여기서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 괜히 힘을 실어 더 소란스럽게 잘랐다. 아까 쌓아 둔 화가 조금이라도 풀리길 기대하면서.

 

 

“도와줄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교실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었다. 이름이...... 한채아는 눈을 찌푸려가며 명찰에 쓰여 있는 이름을 읽으려 했다. 박...... 은수? 

 

 

“그래, 은수야. 그럼 내가 심을 제거할 테니까, 네가 이것 좀 파쇄해 줘.”

 

 

박은수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한채아와 박은수는 한 시간이 넘는 사투 끝에 결국 서류 폐기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한채아는 실처럼 파쇄된 종이 더미들을 들어 분리수거함에 쑤셔 넣었다. 모의고사까지 2주도 안 남았는데, 여기서 시간낭비나 해버렸다. 한채아는 제 옆에서 책상 위에 남겨진 자잘한 종이 부스러기들을 쓸어담고 있는 박은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박은수. 오늘 고마웠어. 너 아니었으면 엄청 난감했을 거야.”

 

 

한채아가 입꼬리를 올려 슬쩍 웃었다. 박은수가 한채아에게 말했다.

 

 

“너, 나 누군지 모르지.”

“모르긴 왜 몰라? 너 우리 반 박은수잖아.”

 

 

내 이름이 박은수야?

 

한채아의 시선이 박은수의 명찰로 향했다. 아까는 흐릿해서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지만, 가까이 닿아 있는 지금에서야 선명하게 보이는 이름. 박윤수.

 

한채아는 창피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쓸데없이 아는 체를 했다. 아씨, 그냥 모른다고 할 걸. 애써 웃음을 참던 박윤수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만 모르는 거야?”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 아직 우리 반 애들이 누군지도 잘 몰라.”

“그럼 일단 내가 싫은 건 아니지?”

“어. 오늘 처음 알았는데, 좋고 싫을 게 뭐 있어.”

“다행이네.”

 

 

한채아의 박윤수에 대한 첫 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조차 몰랐던 걸 알게 한 것이 조금 미안했을 뿐이었다. 곤란했던 자신을 도와 줬던 사람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근데 왜 다행이야?”

“어?”

“내가 널 싫어하지 않는 게 왜 다행이냐는 말이었어.”

 

 

박윤수는 대답 없이 창가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숙였다가, 옆으로 조금씩 까닥였다가, 눈도 몇 번 깜빡였다. 도무지 대답해 줄 것 같지가 않아서, 한채아는 답변을 포기하고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방을 어깨에 메기 위해 일어설 즈음, 박윤수가 입을 열었다.

 

 

“왜일 것 같아?”

 

 

오랫동안 고심해서 내놓은 답이라기엔 지나치게 미지근했다. 미지근한 대답이 교실의 뜨거운 공기를 타고 한채아에게 도달했다. 묘하게 열감이 느껴졌다. 한채아는 제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조금, 뜨거워진 것 같다. 고개를 푹 숙였다. 둘은 잠시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한채아가 고개를 들었다. 박윤수는 이미 한채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교실에 걸린 흰 커튼이 바람을 맞아 살랑인다. 박윤수가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다. 한채아가 눈을 꾹 감았다.

 

 

“나, 그, 내가, 이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아. 오늘 고마웠어.”

 

 

답을 들을 새도 없이 한채아가 허둥지둥 가방을 들쳐 메고 교실을 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간 정신이 들어온 건 한채아가 편의점도 지나치고 독서실 입구까지 무작정 걸어 도착했을 즈음이었다. 그제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

 

 

큰일이다.

 

파도가 예고 없이 밀려온다.

 

파도의 이름은 사랑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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